학교기사 고신을 빛낸 이달의 인물(4) - 주남선, 재건된 경남노회의 첫 노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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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남선, 재건된 경남노회의 첫 노회장
한상동 목사와 함께 고려신학교의 설립자인 주남선 목사는 1888년 9월 14일(고종 재위 25년) 거창군 읍내면에서 출생했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주 목사는 주기철 목사(1897 생)나 한상동 목사(1901 생) 보다도 나이가 훨씬 많다. 1920년에 평양 신학교에 입학하여 1930년에 졸업했으니 신학교 졸업은 주기철 목사보다 늦었지만 신학교 입학은 2년 정도 빨랐다. 참고로 신사참배 반대 운동을 함께 이끌었던 방계성 전도사와 동연생이다. 한상동 목사에 비해서 주남선 목사가 오늘날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이유는 고려신학교가 세워지고 나서 5년 후 한국전쟁 기간 중 하나님의 부르심을 일찍 받았기 때문이다.
출신지에서 알 수 있듯이 주남선 목사는 거창의 사람이었다. 거창에서 태었났고 거창에서 성장하다가 호주 선교사를 통해 복음을 받아들인 후 1909년 10월 10일 오늘날 거창교회를 설립했다. 이후 이 교회는 거창지역 복음화의 중심 교회가 되었고, 또한 신사참배 반대 운동의 상징이 되었다. 거창 교회가 설립되기 2년 전에 조선예수교장로교 독노회가 처음으로 조직되었고 한국인 목사들이 본격적으로 사역하면서 한국교회 전체가 부흥하고 있었다. 거창교회가 설립되고 1년도 지나지 않아 조선은 멸망하고 말았지만 복음의 선포와 교회 개척은 오히려 더 활발하게 전개 되었다.
주 목사는 31살이 되던 해 1919년 진주에 있는 경남성경학원을 졸업했고 3월 20일에는 교인들과 함께 만세 시위를 주도했다. 같은 해 12월에는 장로로 임직받았고 다음해 1920년에 평양신학교에 입학했다. 1916년 총회에서 경상노회를 경북노회와 경상노회로 분리할 것을 결정한 이후 거창교회는 경남노회에 소속하게 되었고 경남노회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신학교에 입학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주 목사는 시위를 주동한 혐의로 체포되어 1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고 복역 중 가출옥하였다. 출옥 이후 주 목사는 권서인과 전도사로 활동하면서 평양신학교에서 간헐적으로 공부하다가 1930년에 입학한 지 무려 10년 만에 졸업을 했다. 그 당시에는 교역자가 매우 드물었기 때문에 목회와 학업을 병행하는 것은 매우 흔한 일이었다. 거창과 평양 사이의 물리적 거리도 연속적인 학업을 어렵게 했음이 분명하다. 신학교를 졸업한 그 해 주 목사는 거창교회의 담임 목사로 부임했다.
거창교회에서 담임 목사로서 목회를 시작하고 나서 몇 년 지나지 않아 주 목사는 큰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 1931년에 만주사변이 일어나고 1937년에는 중일전쟁이 본격화되자 일제는 군국주의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조선을 일본화 시키기 위한 방법 중 하나로 일제는 신사참배를 교회에 강요하기 시작했다. 주 목사는 신사참배를 우상숭배로 규정하고 이에 대한 반대 운동을 주도했다. 1938년 9월 10일 조선예수교 장로회가 공식적으로 신사참배를 인정하자 주 목사는 거창교회를 사임할 수밖에 없었다. 사임 이후에도 주 목사는 신사참배 반대 운동을 중단하지 않았고 1940년 7월 16일에 체포되었다.
주 목사의 수감 생활은 해방까지 무려 5년이나 이어졌다. 주 목사가 없는 동안 경남 노회는 쇠망의 길을 걷게 되었다. 1943년에 조선예수교장로회가 일본기독교 조선장로교단으로 강제로 개편되었고 이때 대표적인 친일파였던 김길창 목사가 경남 교구장을 맡았다. 해방 한 달 전 일제는 개신교 모든 교단들을 통합하여 일본 기독교 조선교단을 조직했는데 이로써 경남 노회는 물론 조선 장로교회 자체가 법적으로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따라서 해방 이후 경남노회를 비롯하여 장로교회는 완전히 새롭게 재건되어야만 했다.
해방된 조국에서 무너진 장로교회를 재건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해방은 분단으로 이어졌기 때문에 3,8선 이북에서는 장로교회가 재건되는 것 자체가 사실상 원천 봉쇄되었다. 3,8선 이남의 장로교회 역시 신사참배에 부역한 이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올바로 재건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나마 주남선, 한상동 목사가 속해 있었던 경남노회만 겨우 참된 새 출발을 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을 뿐이었다. 주남선 목사는 평양 감옥에서 출옥한 이후 다시 거창교회로 부임을 받았으며, 재건된 경남노회에서 초대 노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이 사실은 그가 경남 노회에서 얼마나 총대들에게 폭넓은 신임을 받았는지를 잘 알 수 있다.
고려신학교는 주남선 목사가 노회장으로 재직하는 동안 경남노회의 결의로 1946년에 설립되었다. 한상동 목사의 실행능력이 제대로 발휘될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는 주 목사의 리더쉽과 후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안타깝게도, 고려신학교가 설립된 이후 주 목사는 신학교를 둘러싼 노회 안의 대립을 계속 지켜보아야만 했다. 한국전쟁이 발생했을 때 주 목사는 피난도 가지 않고 거창에 남아 있는 성도들과 함께 했다. 해방 전 일제의 박해를 견뎌야 했던 주 목사는 이제 연로한 상태에서 동족들에 의해 다시 한 번 박해를 견뎌야 했다. 주 목사는 한국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3월 23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이성호 교수(고려신학대학원 교회사)
※ 위 연재내용은 고신언론사와의 공동프로젝트 추진 업무 협약에 따라 기독교보에도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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