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기사 고신을 빛낸 이달의 인물(1) - 박윤선 목사, 고신 신학의 토대를 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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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신을 빛낸 이달의 인물(1) - 박윤선 목사, 고신 신학의 토대를 놓다
1905년 평안도 정주에서 출생한 박윤선 목사는 고신교회의 신학적 기초를 쌓은 분이다. 박 목사는 1946년 9월 20일 고려신학교가 설립되었을 때 교장(서리)로 봉사했다. 주경신학을 비롯하여 대부분의 주요과목을 학생들에게 직접 가르쳤다. 박 목사가 없었다면 오늘날의 고신교회는 매우 미약하게 존재하거나 지금과 많이 달라져 있을 것이다. 이것은 해방 이후 교회 재건을 시도했던 여러 운동들이 결국 쇠락의 길을 걸어갔던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은 고신교회의 두 기둥이다. 주남선, 한상동 목사가 신사참배 반대 투쟁을 통하여 교회의 순결을 지키려고 했다면, 박 목사는 일제 말에 교회에 지배하고 있었던 자유주의 신학으로부터 교회의 진리를 사수하려고 했다. 따라서 고신 운동은 주남선, 한상동 목사와 박윤선 목사의 협력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만약 박 목사가 고려파 운동에 가담하지 않았으면 고려신학교는 제대로 출발하지 못했을 것이다.
박윤선 목사는 원래 한학(漢學)을 공부하다가 기독교로 개종한 후 송상석 목사와 함께 1931년에 평양신학교에 입학해서 1934년에 졸업을 했다. 한상동 목사는 1933년에 평양신학교에 입학했으니 1년 동안 서로 알고 지냈다. 이와 같은 개인적인 교제가 있었기 때문에 박 목사가 10여년 뒤에 고려파 운동에 쉽게 가담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박 목사가 평안도 출신이고, 송상석, 한상동 목사가 경남 출신이라는 지역적 한계도 있었다.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후 박 목사는 도미하여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석사 과정을 마치고 귀국했다. 귀국한 후 평양신학교에서 성경 원어를 가르쳤으나 1938년 신사참배로 평양신학교가 폐교되자 박 목사는 다시 도미하여 웨스트민스터에서 변증학을 공부했다. 첫 번째 공부가 주로 성경원어와 주석을 위한 공부였다면, 두 번째는 성경영감과 무오성에 대한 공부였다. 이 두 가지는 박 목사에게 신학 교육의 토대가 되었다. 1941년 신사참배를 반대했던 여러 교단의 지도자들이 협력해서 만주에서 봉천신학교를 시작하자 박윤선 목사는 이곳에서 강의를 했다.
해방이 되자 박 목사는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는 평생 성경 주석을 집필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북이 공산화되면서 자신의 사명을 이루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자 1946년 3월 서울로 내려와서 거주하게 되었다. 그 해 4월에 개최된 남부총회가 조선신학교를 총회 인준 신학교로 정하자 바른 신학교를 재건해야 할 필요성이 증가되었다. 한상동 목사는 서울에 있는 박 목사를 만나 고려신학교 설립에 동참할 것을 설득하는데 성공했다.
박 목사와 한 목사의 만남이야말로 한국 장로교회 재건에 있어서 역사적인 만남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박 목사가 월남하지 않았더라면, 그냥 대세를 따라 박 목사가 남부대회에 합류했더라면, 그냥 홀로 남아서 학자로서 저술하는 것에만 힘썼더라면 고려신학교는 굳건하게 출발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오늘날과 달리 그 당시 신학교에서 개혁주의 신학을 제대로 가르칠 수 있는 교수는 박윤선 목사 외에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다.
신학교 재건에 대한 열정은 충만했지만 그 외에는 제대로 준비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박 목사 외에는 교수도 없었고, 학생들도 없었고, 건물도 없었다. 다행히 고려신학교의 예비단계라고 할 수 있는 진해신학 강좌가 성공적으로 마무리 되었다. 박윤선 목사의 명성이 없었다면 학생 모집은 훨씬 더 어려웠을 것이다. 비록 건물은 없었지만 교수와 학생이 확보되자 마침내 1946년 9월 20일에 고려신학교가 개교할 수 있었다. 1938년 평양신학교가 9월 20일에 폐교되었으니 정확하게 8년 만에 평양신학교의 전통을 있는 새로운 신학교 설립이 된 것이다.
박윤선 목사는 한국인으로서 역사상 최초로 네덜란어로 된 신학 책을 자유롭게 읽을 수 있는 신학자였다. 1940년 대는 네덜란드에서는 흐로솨이드나 리더보스와 같은 당대 최고의 주경신학자들이 활동하던 시기였고 박 목사는 그들의 저술을 화란어로 섭렵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탁월한 성경해석들이 그의 성경 주석 곳곳에 숨겨있다. 그는 1979년 최초로 성경 전권에 대한 주석을 완료했고, 오랫동안 교단을 초월하여 모든 목사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주석의 내용도 탁월했지만 이용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주석이었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박윤선 목사는 결국 고신을 떠났고, 그로인해 고신 총회는 막대한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감사하게도, 박 목사가 남긴 신학적 토대는 고신 교회 안에 그루터기처럼 남았다. 만약 박 목사가 끝까지 고신에 남았더라면 오늘날 고신 교회는 더 튼튼한 교회가 되었을 것이다. 박윤선의 신학과 삶은 교회로 하여금 신학교수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한다. 태생의 역사에 비추어 볼 때, 고신 교회의 미래는 유능하고 신실한 신학교수를 얼마나 지속적으로 길러내는가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이성호 교수 (고려신학대학원, 교회사)
※ 위 연재내용은 고신언론사와의 공동프로젝트 추진 업무 협약에 따라 기독교보에도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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