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기사 고신을 빛낸 이달의 인물(3) - 김영진•임옥희 선교사, 고신에서 파송한 첫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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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진(임옥희), 고신에서 파송한 첫 선교사
1952년 ‘대한예수교장로회총노회’가 발회한 이후, 고신교회는 1955년 4월 19일 부산 남교회당에서 소집된 제4회 총노회에서 해외선교를 관장할 상비부로 선교부를 조직했다. 1956년 총노회에서는 고신교회가 총회(6회 총회)로 조직된 것을 기념하여 해외 선교사를 파송하기로 결의했다. 한부선(Bruce F. Hunt) 선교사의 조언에 따라 중국의 공산화로 입국할 수 없었던 중국 대륙을 내다보면서 첫 선교지를 대만으로 정하고, 첫 선교사로는 당시 제2영도교회를 담임하고 있던 김영진 목사를 내정했다. 6.25 한국전쟁(1950-1953)의 격랑이 이제 막 끝난 시점이었음에도 고신교회는 처음부터 SFC 강령에서 밝힌 대로 ‘개혁주의 세계교회 건설’을 중요한 사명으로 고백한 것이다.
김영진은 1946년 진해에서 개최된 제1회 하기 신학 강좌에서 한명동 목사의 설교를 듣고 일생에 붙들게 된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우리가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로다.”(롬 14:8) 그리고 빌 1:20-21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사역자로 결심을 하게 된다.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노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그는 1949년 9월 새롭게 시작된 고려신학교에 1회로 입학하고, 1955년 첫 졸업생이 되었다. 그는 첫 사역지인 울산 방어진교회에서 집집마다 전도하며 교회를 성장시켰다. 1951년 경남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제2영도교회의 초빙으로 1957년까지 5년 10개월 동안 섬겼다. 그는 부흥 사경회 강사로 온 총회선교부장 이인제 목사로부터 대만 선교사로 가도록 권면을 받고, 제7회 총회(1957년 9월 20일) 회기 중에 선교사로 파송된다. 이듬해인 1958년 5월 13일 부인 임옥희 선교사와 입양한 딸 김난나 세 가족은 죤 워트맨호(John B. Waterman)를 타고 대만으로 향했다.
첫 선교사를 파송했지만 교단에서 3년 동안 선교비를 제때에 보내지 못해 상당한 경제적인 고초를 겪어야 했다. 첫 안식년이 되어 사역을 돌이켜 보면서 김영진은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선교가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신임선교사의 발걸음은 참으로 무거웠다. 선교지 답사나 동역자도 없었고 기본 선교 정책이나 언어수업 방법 등 사전 이해나 준비가 너무나 부족하여 힘겨운 출발을 했다. 대만은 도착한 해에 중공군의 폭격이 44일이나 지속되어 군사적 위협으로 주민들은 매우 불안한 정세였다. 또 잦은 태풍과 지진도 일어났고, 대홍수와 콜레라 유행 등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우리 선교부에서 회계 장로님의 별세로 선교비가 장기간 송금되지 못한 어려움도 있었다. 그러나 내외적인 어려움 가운데서도 신실하신 주님은 계획하신 대로 앞서 일하시며 친히 이끌어 주셨다. 선교지 답사를 할 수 있도록 전국 각지의 초청 설교와 집회의 기회를 주셨고 신죽 남문교회의 설립, 선교관 건립, 신학교 개교, 객가어 방송전도, 맹인교회 설립, SFC 수련회, 쌍계전도소 개척 등 생각 밖에 광범위하게 봉사의 문을 열어 주셨다.”
2기 사역 기간 동안 그는 본격적으로 교회 개척 사역을 하여 신죽교회, 죽동교회, 산지화원교회, 중리교회, 충효교회가 개척되었다. 무엇보다 이 기간 동안 한국고신장로교회(KPC), 미정통장로교회(OPC), 미개혁장로교회(CRC), 뉴질랜드 개혁장로교회(NRPC), 그리고 미세계장로교회가 힘을 모아 대만에 하나의 개혁종 교단을 형성한 것은 고신 선교에 큰 이정표로 남게 되었다. 1966년에는 김영진 선교사가 운영하던 개혁신학연구반과 CRC가 운영하던 타이베이의 칼빈신학교를 병합하여 칼빈연합신학교(이후 기독교개혁종장로회 신학원)가 설립되어 목회자들을 양성했다. 그리고 마침내 1971년 3월 1일 신죽의 민족로교회에서 5개의 교회 목사, 장로, 선교사들이 모여 노회 창립대회를 열고 총노회를 발족했다.
1986년 11월 고신 총회선교부는 김영진을 선교부 총무로 임명하였고, 1990년 9월 21일 정년은퇴까지 4년간 선교지와 본국을 오가며 봉사했다. 총회선교부에서 그는 회계제도를 쇄신하고, 협력후원제도를 수립하였으며, 독립된 선교부 사무동을 확보하고, 고신선교훈련원을 개원하는 등 KPM 행정의 주요한 초석을 다졌다. 김영진은 1990년 9월 19일 제50회 총회(대구 성산교회)에서 정년 은퇴예배를 드렸다. 은퇴 후 그는 다시 대만으로 돌아가 3년간 아직 어린 교회들을 돌보며 의미 있는 삶을 살았고, 2001년 1월 19일 아침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김영진 선교사의 유언은 “가장 소중한 주님을 목표하고 살아라.”였다. 노년의 김영진 선교사에게 “선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 한 가지가 있다면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주어졌을 때, 그는 “현지인 동역자를 잘 만나는 것”이라 답했고, “제일 아쉬운 것 한 가지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는 “좋은 인재를 더 많이 기르지 못한 것”이라 답했다.
권효상 교수 (고려신학대학원, 선교학)
※ 위 연재내용은 고신언론사와의 공동프로젝트 추진 업무 협약에 따라 기독교보에도 게재되었습니다.
<시리즈>
◈ 고신을 빛낸 이달의 인물(1) - 박윤선 목사, 고신 신학의 토대를 놓다
◈ 고신을 빛낸 이달의 인물(2) - 한부선 선교사, 고신선교의 초석을 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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