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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시론] 여유를 가지자 - 한정건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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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8,761회 작성일 08-06-09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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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유를 가지자

한정건 교수



  필자의 마을 입구에 “미친소 몰고오는 FTA 결사반대”라는 현수막이 붙어있다. 그 현수막을 보면 “미국 소”=“미친 소”라는 등식이 성립되며, 그러므로 FTA는 목숨을 걸고 반대하겠다는 것이 된다. 최근에 거리에 뛰쳐나온 학생들이 들고 있는 현판에는 “아직 15년 밖에 못살았어요”, “우리는 살고 싶다”, “함께 살자 대한민국” 등의 글들이 보인다. 미국 쇠고기를 먹으면 광우병에 걸리고, 그래서 모두 죽을 것이라는 공포를 느끼게 한다. 야당 국회의원들은 국민건강을 미국에 갖다 바쳤다고 호통을 친다. 나라가 온통 광우병 공포에 휩싸여 있다. 여당과 정부쪽에서는 상대를 거짓된 정보에 부풀기를 한다고 공격한다. 여태까지의 광우병 걸린 소와 피해입은 사람은 몇억분 일 정도의 확률임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것도 2004년 이후에는 발생하지 않았는데, 마치 미국의 모든 많은 소가 현재 그 병에 걸려있는 것처럼 민심을 오도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재협상이란 있을 수 없다고 한다. 그러니 싸움은 끝이 날 공산이 없다. 이러한 들끓음이 언제까지 갈까?

  지난 대선 때에는 BBK가 온 나라를 흔들었다. 김경준이 웃음을 띄면서 검찰에 끌려가는 모습과 함께 온 국민이 그 소용돌이로 빨려 들어갔다. 한쪽에서는 그를 영웅시 떠받들었고 이명박을 부도덕한 거짓말쟁이로 몰아붙였다. 당시의 여당 후보자는 ‘그런 사람과 TV 토론을 위해 옆에 앉아있는 것조차 부끄럽다’고 망신을 주었다. 또 반대쪽에서는 김경준을 거짓말쟁이로, 그리고 그를 이용하여 또 표를 도적질해가려는 것으로 꼼수로 공격했다. 검찰 조사결과 발표 뒤에도 그 싸움은 더 격렬해 졌었다. 국회가 특검으로 치고받는 소동까지 벌였다. 특검의 결과는 어느 한쪽을 완전히 날려버릴 큰 폭탄과 같이 여겨졌었다.
  그러나 대선이 끝나고는 갑자기 조용해져 버렸다. 세상은 특검의 수사에 그다지 뜨거운 관심을 기울이지도 않더니, 또 특검 발표가 있은 뒤에는 언제 그런 소동이 있었느냐는 듯 모두들 그 일을 잊은 듯하다. 그렇게 결사적으로 큰소리치며 떠들었던 야당과 일부 시민단체들은 언제 우리가 그렇게 하였느냐는 듯이 태연하다. 그런 경험을 비추어 볼 때에 아마도 광우병 사태도 시간이 지나면 조용해 질 것이고, 더 나아가 사람들은 태연하게 미국산 소고기를 사서 먹고 있을 상황이 올 것이라 추측된다.

  왜 이렇게 나라에 소동들이 잘 일어나는가? 갈수록 사람들의 마음이 더 각박해지는 것 같다. 한번 싸움이 붙었다면 나의 주장이 100% 옳으며, 상대방은 무조건 잘못되었다는 흑백만 사람들의 생각을 온통 지배해 버리는 것 같다. 이러한 사태들은 한국 사람들의 다혈질적이고 “빨리 빨리”로 대변되는 급한 성격에 기인한 면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나 스스로의 정의감에 사로잡혀 그 문제는 꼭 내 손으로 해결해 내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 탓도 있는 것 같다.
  이러한 현상은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분쟁에서는 더 심해진다. 흔히 하는 소리로 ‘세상 사람들은 그래도 소주 한잔에 서로 마음을 푸는 여유라도 있지만 교인들 간에는 그 여유조차도 없다’고 한다. 목사와 장로, 그리고 성도들 간에 일어나는 분쟁에는 ‘너 죽고 내가 살아야 한다’는 식으로 끝장을 내는 싸움판이 된다. 양쪽 모두가 스스로 옳으니 해결될 수 없는 것이다.

  우리 모두 이제 냉정을 되찾고 여유를 가져야 하겠다. 특히 교회 안에서는 문제가 발생할 때에 여유를 가지고 대처하는 원리를 성경에서 찾아야 하겠다. 바로 내 손으로 끝장내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에게 맡기자는 원리이다.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그렇게 쫓아다닐 때에 다윗은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의 금하시는 것이니...”(삼상 24:6)라고 말하며, 그는 자기 원수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였다. 왜 그랬을까? 자기의 비참함이 그리 심하지 않아서 참을 수 있었을까? 다윗에게 상대방 잘 못에 대한 의분이 없어서 그랬을까? 아니다. 다윗은 쫓겨 다니는 자신의 처지가 얼마나 비참한지를 ‘개’와 ‘벼룩’에 비유하면서 표현하였다: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 이다”(시 22:6; 삼상 14 참조). 그리고 자기를 해하려 하는 자를 철저하게 원수로 간주하였다: “나의 원수가 내게 대하여 악담하기를 저가 어느 때에나 죽고 그 이름이 언제나 멸망할꼬 하며”(시 41:5).

  그러면 다윗은 왜 악한 자를 자기 손으로 처치할 기회를 살리지 못하고 피하였는가? 왜 빨리 악을 제거하지 않고 자기의 억울함을 해소하려고 하지 않았는가? 그것은 자기의 손으로 그 일을 이루기 원치 아니한 것이었다. 다윗은 그 일을 하나님의 손에 맡겼다: “여호와께서는 나와 왕 사이를 판단하사 나를 위하여 왕에게 보복하시려니와 내 손으로는 왕을 해하지 않겠나이다”(삼상 24:12). 그러면서 하나님에게 빨리 그러한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하소연 하였다: “여호와여 나와 다투는 자와 다투시고 나와 싸우는 자와 싸우소서 방패와 손 방패를 잡으시고 일어나 나를 도우소서”(시 35:1-2). 그리고 그는 잠잠하기만 하시는 하나님을 원망하지 아니하고 기다리면서 오히려 찬송하였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42:11; 43:5). 상대가 칼을 들이대는데도 피하기만 하는 다윗, 그리고 당장 떨어져야 마땅한 하나님의 진노가 아직 소식이 없는데도 기다리는 다윗, 그 기다림 속에서 오히려 자기의 편이 되어주실 하나님을 믿고 찬양하는 모습에서 진정 성도가 가져야할 여유가 보인다.

  아랍사람들에게 “안샬라”라는 말이 거의 입에 붙어있다. 인사를 할 때에도 “안샬라”고 하지만, 교통사고 등의 일이 일어날 때에도 “안샬라”라는 말로서 그만이라고 한다. 의미는 “신의 뜻대로”이다. 나와 당신 사이에 일어난 일은 ‘신의 뜻대로 된 것이니 어쩌겠느냐’는 것이다. 일전에 국경을 넘을 때에 도장 몇 개를 찍고 자기들끼리 환담하고 왔다 갔다 하면서 일을 빨리 처리해 주지 않는 사무원들의 모습을 볼 때에 답답하기 그지없었던 경험이 있다. 그러나 아랍 사람들은 “안샬라”를 되뇌면서 한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에 ‘모두 세상을 그렇게 태평스럽게 살아가서야 어찌하노!’라고 안타까워했었다.

  아랍 사람들이 우리나라 사람들의 “빨리빨리”를 배울 필요가 있겠지만, 우리는 아랍 사람들의 여유를 배울 필요가 있겠다. 한국 사람들, 상대방의 말에도 귀를 기울이는 여유를 가지자. 특히 기독교인은 “내 손으로 끝장을 내고 말겠다”는 해결방법 보다 하나님에게 맡기는 여유를 가져야 하겠다. 내가 아닌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는 결과”가 최선이 될 것임을 믿는 데서 오는 여유가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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