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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기고글] 마태복음의 잃은 양 비유 - 길성남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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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1,167회 작성일 08-04-23 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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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의 잃은 양 비유

선지동산 35호 게재 / 성경본문 바로읽기(3) / 길성남 교수




        마태복음에 등장하는 ‘잃은 양’ 비유를 알고 계십니까? 대체로 사람들은 누가복음 15장에 실려 있는 잃은 양 비유는 잘 알지만 마태복음에 실려 있는 잃은 양 비유는 잘 모릅니다. 마태복음에 잃은 양 비유가 등장한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아마도 누가복음의 잃은 양 비유가 너무 유명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마태복음 18장 12-14절을 읽어 보십시오. 누가복음 15장 3-7절에 기록된 것과 거의 같은 잃은 양 비유가 등장합니다. 두 비유를 비교하면 마태복음의 잃은 양 비유가 더 짧고, 두 비유 사이에 한, 두 가지 차이점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두 복음서에 기록된 잃은 양 비유의 기본 내용은 별 차이가 없습니다.  

        두 비유의 내용이 같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두 비유를 같은 관점에서 읽고 같은 교훈을 끌어냅니다. 그들은 아주 태연하게 누가복음의 잃은 양 비유를 읽는 관점으로 마태복음의 잃은 양 비유를 읽습니다. 이렇게 하여 그들이 마태복음의 비유에서 끌어내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죄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을 기뻐하시는 분이므로 우리도 죄인들이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열심히 전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의 잃은 양 비유를 이렇게 읽고 해석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어떤 식으로든지 본문을 통해 은혜를 받고 자기 나름대로 하나님의 뜻을 깨우치면 그만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하지만 성경 본문을 읽을 때 그 본문을 말씀하신 주님의 의도나 성경 기자의 의도가 무엇인지 질문해야 합니다. 성경해석의 가장 중요한 목표가 본문을 말씀하신 주님이나 성경 기자의 의도를 바르게 파악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나 성경 기자의 의도는 아랑곳 하지 않고 소위 은혜를 받기 위해 독자 중심적으로, 또는 청중 중심적으로 본문을 읽는 것이 한국교회 강단의 가장 큰 병폐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면 마태복음의 잃은 양 비유를 말씀하신 주님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무엇보다도 문맥 관찰을 통해 비유의 상황과 대상, 그리고 비유의 요점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마태복음의 잃은 양 비유는, 누가복음의 잃은 양 비유와 비교할 때, 비유의 상황과 청중이 다릅니다. 누가복음에서 비유의 청중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인데 비해, 마태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비유의 청중입니다. 누가복음에서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들을 영접하는 것을 문제 삼습니다(15:1, 2). 반면에 마태복음에서는 제자들이 예수께 나와 천국에서 누가 크냐고 질문합니다(18:1). 그러자 예수님은 한 어린아이를 세우시고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라고 대답하십니다(4절). 이어서 예수님은 누가 큰 자인가 하는 것으로부터 자기를 믿는 소자를 실족케 하는 것(=믿음을 저버리게 만드는 것)으로 화제를 바꾸십니다. 소자를 실족케 하는 것은 매우 심각한 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소자 한 사람을 실족케 하는 것보다 연자 맷돌을 목에 달고 깊은 바다에 빠져 죽는 편이 더 낫다고 말씀하십니다(6절). 또 소자를 실족케 하는 범죄의 심각성을 경고하기 위해 손이나 발이 범죄케 하거든 찍어버리라고 엄히 말씀하십니다(8, 9절). 그러면서 “삼가 이 소자 중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10절). 저희에게 천사들이 있고, 그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뵙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문맥 안에서 잃은 양 비유가 등장합니다. 마태복음의 잃은 양 비유의 요점은 14절에 나타납니다. “이와 같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이것은 누가복음의 잃은 양 비유의 결론과 확연히 다릅니다(15:7). 누가복음에서는 죄인의 회개에 관해 말씀하시는데, ‘죄인’이란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누가복음의 잃은 양 비유의 요점은, 하나님께서 죄인 하나가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을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마태복음에서는 소자를 잃는 것에 관해 말씀하시는데, ‘소자’란 예수를 믿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마태복음의 잃은 양 비유의 요점은, 믿음의 공동체에 속한 소자를 잃어버리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믿는 소자의 중요성과 함께 소자들 중 한 사람이라도 잃어버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 줍니다.  

        그러면 마태복음에서 잃은 양 비유를 말씀하신 예수님의 의도는 무엇일까요? 제자들은 3년 가까이 예수님을 모시고 가르침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세상적 가치관과 관점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 높은 자리를 탐하고 자리다툼을 벌였습니다. 그렇게 하는 가운데 그들은 자신들보다 부족한 사람들, 여자들, 어린아이들을 의연 중에 무시하였습니다. 무시당하는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마음에 상처를 입고 제자 공동체를 떠나거나 믿음을 포기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상황을 안타깝게 여기시고, 서로 높은 자가 되려고 다투는 제자들에게 자기를 낮추는 자가 바로 큰 자라는 천국의 원리를 가르치고자 하셨습니다. 동시에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사람들, 어린아이들이라도 결단코 무시하지 말고 그들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 곧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임을 분명히 가르치고자 하신 것입니다. 바로 이런 교훈을 주시는 것이 잃은 양 비유를 말씀하신 예수님의 의도인 것입니다.

        그러면 마태복음의 잃은 양 비유를 통해 주님께서 현시대를 사는 성도들에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소자들을 업신여기거나 그들을 실족케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자기를 높이지 말고 도리어 자기를 낮추고, 소자들을 소중히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 안에서 많이 배우고 많이 가진 사람,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대접을 받고 있습니다. 심지어 자기를 낮추는 자가 곧 높은 자라는 천국의 원리를 내팽개치고 높은 자리를 얻기 위해 이전투구하는 지도자들도 많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가진 것 없고 배우지 못한 사람들, 장애를 가진 사람들, 사회적 지위가 낮은 사람들은 무시를 당합니다. 많은 소자들이 상처를 받고 아픔을 겪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시험에 들어 교회를 떠나기도 합니다. 이렇게 소자들이 실족할 때 날마다 하늘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뵙는 그들의 천사들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또 소자들을 돌아보지 않고 힘 있고 재력 있는 이들을 가까이하면서, 자리다툼에 골몰하는 지도자들을 하나님은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오늘날 우리는 자기를 낮추는 자가 곧 천국에서 큰 자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회복하고, 교회 안에서 소자들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그들이 상처를 입고 교회를 떠나는 일이 없도록 소자들을 배려하고 잘 돌보아야 하겠습니다.

        누가복음의 잃은 양 비유를 읽는 관점으로 마태복음의 잃은 양 비유를 잃으면 이런 교훈이 눈에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더 나아가 누가복음의 의미를 마태복음의 비유에 주입하여 읽는 것은 주님의 의도를 무시하는 ‘신성모독의 죄’를 범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비유가 선포되는 상황과 비유의 청중, 그리고 비유의 요점을 꼼꼼하게 살핌으로써 비유를 말씀하신 주님의 의도를 파악해야 합니다. 이것은 비단 비유의 경우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본문을 읽을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본문을 말씀하신 주님이나 성경 기자의 의도를 무시하고 은혜 중심적으로 본문을 읽으면 생각과 가치관의 변화, 더 나아가 삶의 변화가 일어날 수 없습니다. 본문을 말씀하신 주님이나 본문을 기록한 성경 기자의 의도를 파악하고 그것에 비추어 본문을 읽을 때 비로소 우리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고, 말씀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음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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