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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기고글] 벧세메스로 가는 암소 두 마리 - 길성남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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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1,867회 작성일 08-04-23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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벧세메스로 가는 암소 두 마리

선지동산 38호 게재 / 성경본문 바로읽기(6) / 길성남 교수




        사무엘상 5장과 6장에는 하나님의 궤를 실은 새 수레를 끌고 벧세메스로 간 암소 두 마리에 관한 유명한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암소 두 마리는 멍에를 메어본 적이 없는데다가 젖을 빠는 새끼까지 달려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어미 소들이 하나님의 궤를 실은 수레를 끌고 벧세메스로 갑니다. 사람들이 강제로 떼어놓은 송아지들이 뒤에서 울부짖는데도 어미 소들은 걸음을 멈추지 않고 좌우로 벗어나지도 않습니다. 길을 안내하는 사람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암소들은 스스로 벧세메스로 가는 길을 따라 걸어갑니다. 벧세메스에 도착한 뒤에는 번제물로 여호와께 바쳐집니다. 이처럼 말 못하는 짐승이 여러 난관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궤를 벧세메스로 옮기는 일을 완수했을 뿐 아니라 생명까지 바친 것은 자못 감동적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이 암소 두 마리에 관한 기사를 그리스도인 사명자들이 따라야 할 희생적인 헌신의 아름다운 본보기를 보여주는 이야기로 읽고 적용합니다. 설교자들도 임직식이나 헌신 예배에서 벧세메스로 가는 암소들처럼 뒤를 돌아보지 말고 좌우로 치우치지 말고 맡은 사명을 완수하라고 설교합니다. 사명을 마친 뒤에 제물로 바쳐진 암소들처럼 생명을 바쳐 온전히 충성하라고 도전합니다.      

        암소 두 마리에 관한 기사를 이렇게 이해하고 적용해도 어느 정도 유익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실제로 이 본문을 읽거나 이 본문에 관한 설교를 듣고, 영적인 나태와 게으름에서 벗어나 헌신을 다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듣는 사람들에게 영적인 유익을 주고 깊은 감동을 주어 헌신을 다짐하게 만든다고 하더라도, 본문을 기록한 저자의 의도와 맞지 않는 해석이나 설교는 옳지 않습니다! 우리는 소위 은혜와 감동을 주는 성경 읽기와 해석보다 성경 기자나 하나님의 의도에 맞는 성경 읽기와 해석을 추구해야 합니다. 많은 경우에 우리가 추구하는 은혜는 자의적이고 자기중심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진정으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인다면, 성경에서 영적 유익을 얻으려 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서 전달하고자 의도하신 말씀을 잘 들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사무엘상 본문에서 벧세메스로 가는 암소 두 마리에 관한 기사(6:7-14)를 통해 하나님께서 전달하고자 의도하신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메시지를 파악하려면, 무엇보다도 이 기사가 사무엘상 5장과 6장의 넓은 문맥 안에 배치되어 있음을 인식해야 합니다. 그리고 넓은 문맥 안에서 이 기사가 지닌 기능과 의미를 헤아려 보아야 합니다. 사무엘상 5장은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에서 빼앗아 온 하나님의 궤와 관련해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처음에 블레셋 사람들은 하나님의 궤를 아스돗에 있는 다곤 신당 안에 가져다 놓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다곤 신상이 하나님의 궤 앞에 엎드러지고 그 머리와 두 손목이 끊어지는 일이 발생합니다. 그뿐 아니라 아스돗 사람들에게 독한 종기가 생깁니다. 이에 놀란 사람들이 하나님의 궤를 가드로 옮깁니다. 그러자 그 성읍 사람들에게도 심한 종기가 생깁니다. 다시 가드 사람들이 하나님의 궤를 에그론으로 보냈는데 그곳 사람들에게도 여지없이 독한 종기가 생깁니다.  

        이런 상황에 직면하여 블레셋 사람들이 하나님의 궤를 이스라엘로 돌려보내는 문제를 두고 구체적인 논의를 한 것과 그 궤를 벧세메스로 돌려보낸 사실이 6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먼저 블레셋의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은 금으로 종기의 형상 다섯 개와 쥐의 형상 다섯 개를 만들어 이스라엘의 신에게 속건 제물로 바치라고 요청합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궤는 속건 제물과 함께 새 수레에 실어서 이스라엘로 보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멍에를 메어본 적이 없고 젖을 빠는 새끼가 달린 어미 소 두 마리에게 새 수레를 끌게 하라고 제안합니다. 물론 송아지들은 떼어 집으로 돌려보내야 합니다. 하지만 전혀 멍에를 메어 본적이 없는 소가 수레를 끌 수 있을까요? 강제로 격리된 새끼들이 구슬피 우는 소리가 뒤에서 들려오는 상황에서 과연 어미 소가, 그것도 한 마리가 아니라 두 마리가 보조를 맞춰 함께 수레를 끌고 갈 수 있을까요? 이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왜 블레셋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은 이런 불가능한 방법을 제안한 것일까요? 블레셋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임한 재앙이 이스라엘의 신이 내린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을 확신하지는 못했습니다. 자신들에게 패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섬기는 신이 그런 강력한 능력을 행사한다는 것을 믿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궤를 이스라엘로 돌려보낼 뿐 아니라 자신들에게 임한 재앙이 이스라엘 신이 내린 것인지 확인하려고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방법을 채택하게 된 것입니다. 만일 어미 소 두 마리가 스스로 알아서 수레를 끌고 벳세메스로 올라가면 그 큰 재앙은 이스라엘 신이 그들에게 내린 것이 분명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그 재앙은 우연히 일어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6:7-9).

        사건은 어떻게 진행됩니까? 놀랍게도 어미 소 두 마리는 벧세메스 길로 똑바로 갔습니다. 길을 가면서 계속 울음소리를 내기는 했지만 중간에 돌아서지도 않았고 좌로나 우로 벗어나지도 않았습니다(이것을 사무엘하 6:1-7에 기록된 사건과 비교해보십시오). 마침내 어미 소들은 벧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의 밭 큰 바위가 있는 곳에 가서 멈추었습니다. 불가능한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여호와의 궤가 돌아온 것을 보고 기뻐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수레의 나무를 패고 어미 소들을 잡아 번제로 여호와께 드렸습니다. 벧세메스 경계까지 어미 소들을 따라온 블레셋의 방백 다섯 명은 일어난 모든 일을 목격하고 에그론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들이 내린 결론은 무엇일까요? 두 말 할 것도 없이 그들에게 임한 재앙은 이스라엘 신이 내린 것이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블레셋 사람들에게도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알려집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애굽인들과 바로에게서 건져내신 분이요, 블레셋 사람들에게 독한 종기를 내리신 분이요, 다곤 신을 굴복시킨 능하신 분입니다. 비록 이스라엘 사람들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패했지만 그들이 섬기는 여호와는 블레셋 사람들이 숭배하는 다곤신보다 더 강력하신 분입니다. 바로 이것이 사무엘서 기자가 본문을 통해 독자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입니다. 실제로 그는 본문 여러 곳에서 여호와의 손이 블레셋 사람들을 치시고 그들에게 심히 큰 환난을 더하셨다고 말합니다(5:6, 9, 11). 사무엘서 기자는 이스라엘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패했지만 그들이 섬기는 여호와는 강하고 위대한 분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은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주변의 강대국들에게 패하여 비참한 지경에 빠져있을 때에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살아서 역사하시는 분입니다. 이스라엘이 패하거나 망한 것은 하나님이 다른 민족의 신들보다 약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거역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주변의 나라들을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여 범죄한 자기 백성을 벌하십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절망적인 시대에도 절망하지 말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자신들의 죄를 뉘우치고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구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독자들이 본문을 읽을 때 깨달아야 하는 메시지입니다.

        이상과 같은 본문 읽기를 통해 우리는 사무엘상 5장과 6장을 희생적인 헌신의 자세를 가르치는 본문으로 해석하는 것이 잘못임을 알 수 있습니다. 만일 암소 두 마리가 신약 성도들이나 사명자들에게 헌신의 모범이 되려면, 암소들이 스스로 결단하고 사명을 완수하는 주체가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암소들은 스스로 결단하지 않았습니다. 멍에를 메어본 적은 없지만 우리가 수레를 끌고 벧세메스까지 가자고 스스로 결단하지 않았습니다. 새끼들이 울더라도 뒤를 돌아보지 말고 좌우로 벗어나지 말자고 결심하지도 않았습니다. 사명의식이 전혀 없는 암소들이 벧세메스로 갈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강권적으로 이끄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시험하는 블레셋 사람들이 채택한 방책을 관대하게 받아들여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신 것입니다(본래 하나님의 법궤는 레위인들이 어깨에 메고 운반하도록 규정되어 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율법의 규정에 맞지 않는 방법을 채택했지만 하나님은 그 방법을 수용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암소 두 마리가 벧세메스로 간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입증하는 것이지 암소들의 헌신을 보여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말 못하는 암소들을 강권적으로 이끌어 벧세메스로 가게 하심으로써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시고 블레셋에 임한 큰 재앙이 하나님 자신이 내린 것임을 입증하셨다는 말입니다. 비록 이스라엘이 전쟁에서 블레셋에 패했을지라도 이스라엘 사람들이 섬기는 하나님은 강하고 위대하십니다. 동시에 법궤를 이스라엘로 돌려보내심으로써 하나님은 자신이 여전히 살아 역사하는 위대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도 확신시키십니다. 요컨대 사무엘서 기자의 의도와 하나님 자신의 의도가 동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무엘서 5장과 6장을 읽을 때 벧세메스로 가는 암소들에게 초점을 맞추고 그 암소들을 희생적 헌신의 모범으로 볼 것이 아니라, 그 암소들을 벧세메스로 가게 만드신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을 읽어내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보지 못한 채 암소들의 행동만을 보고 암소들처럼 헌신하자고 말하는 것은 실로 황당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음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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