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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기고글] 영적인 폭력 - 박영돈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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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8,119회 작성일 10-07-21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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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인 폭력




  수 년 동안 말씀을 열심히 전해도 교인들이 좀처럼 변화되지 않을 때 설교자는 지치고 탈진한다. 복음전파 사역이 에너지와 시간과 정력을 마냥 소모하는 일 같이 느껴진다. 자신의 청춘을 낭비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든다. 하나님은 왜 이렇게 맥없는 말을 주셨는가? 불을 좀 내려주시지 하는 푸념까지 생긴다. 오랫동안 사역의 열매가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을 때 복음 전파자는 최대의 위기를 만난다. 아무리 말씀을 전해도 변하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서 설교자는 서서히 복음의 능력에 대한 믿음을 잃어간다. 과연 복음이 사람들을 구원하고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는지에 대해 회의가 들게 된다.
  많은 사역자들이 복음만을 전하며 불순종하는 이들을 오래 참고 기다리는 지리하고 고통스러운 십자가의 길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쉬운 길을 택하려 한다. 편법을 동원하려는 유혹에 굴복한다. 기적과 표적으로 사람들을 놀래 까무러치게 하여 그들을 제압하고 굴복시키려 한다.  
  과거 미국의 어떤 한인 교회에 소위 ‘불의 사자’가 있었다. 그 목사가 안수하면 사람들이 불이 붙은 것처럼 뜨거워서 견디지 못하고 팔짝 팔짝 뛰며 나둥그러지곤 했다. 필자가 아는 장로도 그 목사에게 안수를 받았는데 팔뚝에 불이 붙은 것처럼 뜨거워서 양탄자가 깔린 바닥에 엎드러져 팔뚝에 붙은 불을 끄기 위해 바닥을 팔뚝으로 계속 쳤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는 눈물과 콧물을 흘리며 회개했다고 한다. 그가 그런 방법을 통해서라도 회개했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성령님이 그렇게 통닭구이를 만들어서 인간을 변화시킨다고 보기는 힘들다.
  대학생들을 상대로 사역하는 어떤 목사는 교회에 처음 방문한 청년이 예배에 참여하지 않고 그냥 돌아가려고 하자 그를 향해 예수의 이름으로 서라고 명했더니 그 청년의 발이 바닥에 붙어 꼼짝 못하게 되었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엉덩이가 의자에 붙어 몇 시간이고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또 그 목사가 어떤 사람의 귀에 대고 눈이 멀라고 속삭였더니 정말 그 사람의 눈이 한동안 안 보이게 되었다고 한다. 그 목사는 설교를 잘 경청하지 않는 회중을 향해 자주 소경이 되라고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는데 그럴 때마다 그런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들을 기독교 텔레비전방송에서 자랑스럽게 늘어놓는다.
  그 목사는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 사도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을 때 하늘의 강렬한 빛에 의해 소경되었던 사건을 예로 들면서 그런 신기한 현상이 초대 교회에 나타났던 대단한 성령의 역사인 것처럼 말한다. 그러나 다메섹에서 바울이 경험한 것은 부활하신 주님의 현현이었다. 그가 부득불 눈이 멀게 된 것은 찬란한 영광 가운데 계신 주님을 대면함에서 비롯된 지극히 부수적인 현상에 불과했다. 더욱이 어떤 인간이 눈멀라고 명령하여 이루어진 일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에 의한 것이었다. 부활하신 주님이 바울에게 나타난 영광스러운 사건이 아무런 체험의 내용이나 의미도 없이 사람들의 눈을 멀게 하는 해괴한 짓과 도무지 무슨 상관이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
  그 목사는 사람들이 복음을 잘 듣지 않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과 구령의 열정 때문에 그런 기사를 행한다고 한다. 그렇게 사람들을 까무러치게 놀래고 두렵게 하는 기사를 통해 하나님이 살아 역사하심을 분명히 보여주어 그들의 불신을 일격에 날려버리고 그들의 완고함과 교만함을 꺾어버려야 폭발적인 전도의 효과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과연 그것을 성령님의 역사하심이라고 할 수 있을까? 성경 어디에도 성령님께서 그런 식으로 일하신다는 증거를 찾아 볼 수 없다. 그 목사는 다메섹 사건 외에 바울이 살라미 섬에서 전도할 때 총독 서기오가 복음을 믿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박수 엘루마를 꾸짖고 한동안 소경이 되게 한 사건을 그런 예로 든다(행13:4-12). 그러나 거기서 바울은 복음을 잘 안 듣거나 설교시간에 졸고 있는 교인들을 소경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를 정면으로 대적하는 마귀의 사악한 궤계와 역사를 제압한 것이다. 그러한 사실은 바울이 박수 엘루마를 꾸짖은 말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가로되 모든 궤계와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 하겠느냐”(행13:10). 바울
사도가 이런 식으로 대적하는 자들을 제압한 것은 극히 드문 일(성경에 유일무이하게 기록된 사례)이다. 바울은 복음전파를 방해하는 세력들을 항상 그런 통쾌한 방법으로 무찌르지 않았다. 주로 그의 원수들로부터 핍박과 모진 고초를 속수무책으로 당하며 복음을 전파하였다. 교인들에게는 더더욱 온유함으로 복음을 전했다. 그는 에베소에서 3년 반 동안 겸손과 눈물과 오래 참음으로 복음사역을 하였다(행20:19,31). 그는 드로아에서 다락에 모인 교인들에게 밤늦게까지 강론할 때 깊이 졸고 있던 유두고를 향해 소경이 되라고 외치지 않았다(행20:7-12).
  열심히 말씀을 전하는데 설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딴전을 피우거나 조는 이들을 보면
속이 무척 상하는 것이 모든 설교자들이 겪는 아픔이며 안타까움이다. 동시에 큰 시험거리이기도 하다. 복음에 한없이 느리게 반응하는 교인들의 연약함을 오래 참음과 온유함으로 감수하지 못하는데서 혈기 찬 반응이 나오게 된다. 혈기에서 나온 열심이 교인들에 대한 안타까움과 복음에 대한 열정으로 교묘히 위장되고 합리화되기에 자기기만의 위력은 엄청나게 커진다. 여기에 복음전파의 성과가 신속하게 나타나지 않는 것을 견디지 못해하는 조급증과 성취지향적인 성향이 맞물리면, 성령의 원칙보다는 변칙적인 방법으로 사람들을 제어하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조정하기 원하는 유혹은 극대화된다. 오래 참음과 기다림의 과정을 통해 인간을 설복하시는 성령님의 방법을 떠나 복음의 열정으로 가장된 육신의 성급함과 성취지향적인 성향이 그 목적 실현을 위한 능력을 추구할 때 마귀적 능력이 역사할 위험성이 지극히 높아진다.
  이 점이 우리가 심각하게 집고 넘어가야 할 문제이다. 복음 전파의 좋은 의도를 가지고 했고 전도의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고 모든 것이 정당화 될 수 없고, 눈에 나타나는 즉각적인 효과나 변화가 반드시 복음의 참된 결실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설교할 때마다 교인들에게 소경이 되라고 엄포를 놓는 것은 성경의 진리와 성령의 역사하심에서 확실히 벗어난 전도이며, 그런 외침에 따라 사람들의 눈이 안 보이는 기이한 현상은 성령의 역사라고 보기 힘들다. 초자연적인 현상으로 젊은이들을 제압하여 그들의 지성을 마비시키고 의지를 강압함으로 하나님을 섬기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것이 과연 성령님의 역사하심이라고 볼 수 있는지 심히 의심스럽다. 최대한 좋게 생각해서 그것은 강제로 믿게 하는 것이고, 나쁘게 봐서는 일종의 영적인 폭력이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인간에 대해 굉장히 무례한 행위이다. 우리가 비록 비천하고 추한 죄인들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무례하게 대하지 않으신다. 폭군처럼 초능력으로 우리를 두렵게 하여 우리의 자유의지를 억압하고 인권을 유린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강압적으로 다루시지 않고 너무도 부드럽게 대하심으로 우리가 충분히 자율적으로 선택하고 행동하게 하신다. 우리에게 너무도 많은 불순종의 자유를 허용하는 위험부담까지 친히 끌어안으시면서 말이다. 유진 피터슨의 말처럼 “ 하나님은 힘으로 제압하는 혹은 위협하는 표적을 사용하셔서 우리의 자유와 존엄을 해치지 않으신다.” 믿음은 그렇게 강요될 수 없다. “믿도록 위협을 받거나 부추겨지거나 조종당한다면 우리는 믿게 되는 것이 아니라, 위협감, 강탈당한 느낌 혹은 이용당했다는 느낌만 갖게 된다. 그 결과 오히려 믿음에서 더 멀어지게 된다.”그러므로 우리는 초자연적인 현상이나 표적 앞에 우리의 자율성을 쉽게 포기하고 굴복하기를 거부해야 한다. 기적의 노예가 되는 것을 결연히 항거해야 한다. 말씀 앞에 엎드리는 것은 참으로 지혜로운 일이나 기적 앞에 무분별하게 꼬꾸라지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한국 교회에 기이하고 초자연적인 현상으로 인해서 광적인 열심을 내는 이들이 많으나 복음의 진리에 사로잡혀 불꽃같이 타오르는 건강한 신앙을 가진 이들은 희소하다.    
  복음사역자들이 자기도 모르게 인간에게 영적인 폭력을 휘두를 수 있다는 무서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비록 선한 의도에서 비롯되었을지라도 그러한 방법은 성령님이 원하시는 방법이 아니며, 오히려 십자가의 도에 거스르는 것이다.  
  하나님은 벌레 같은 인간들을 위해 처참하게 죽어 주시기까지 그들을 존중하고 사랑하셨다. 이렇게 인자하고 겸손하신 주님을 가장 효과적으로 증거하는 방법이 바로 온유함으로 전하는 것이다. 인간을 놀래 까무러치게 하는 기적이 아니라 복음의 세미한 음성을 통해 역사하는 성령님의 길을 따르는 것이다. 이러한 성령의 역사가 하나님의 성품과 꼭 들어맞는 방법이며 십자가의 사랑과 은혜를 깨닫게 하기에 가장 적합한 방법이다. 성령님이 복음을 통하여 주님의 온유한 음성을 듣게 하시고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의 얼굴빛을 비추어주셔야만 하나님에 대한 참된 믿음과 사랑의 반응이 우리에게서 우러나오는 것이다.

선지동산 57 게재 / 성령의 얼굴(7) / 박영돈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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