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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기고글]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 길성남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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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9,901회 작성일 08-04-23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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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선지동산 39호 게재 / 성경본문 바로읽기(7) / 길성남 교수




         마가복음 2:1-12에는 예수께서 한 중풍병자를 고치신 사건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이 사건은 마가복음 뿐 아니라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도 등장합니다(마 9:1-8; 눅 5:17-26). 다른 두 복음서의 기사들과 마가복음의 기사를 비교해보면 마가가 이 사건을 더 상세하고 더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선 마가는 이 사건이 일어난 곳을 가버나움이라고 분명하게 명시합니다(막 2:1). 누가복음에서는 장소를 언급하지 않으며 마태복음에서는 단지 “본 동네”라고 언급할 뿐입니다(마 9:1). 또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사람들이 중풍병자를 데리고 왔다고 말하는데 비해서 마가복음에서는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 왔다고 상황을 비교적 상세하게 묘사합니다(막 2:3). 그뿐 아니라 마가는 예수께서 도를 말씀하실 때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려들어서 “문 앞에라도 용신할 수 없게 되었다”고 진술합니다(막 2:2). 다른 두 복음서에는 이런 표현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중풍병자를 데리고 온 사람들이 지붕에 올라가서 한 일을 묘사하는 대목에서도 마가의 표현이 더 생생합니다. 마태는 그들이 지붕에 올라간 일을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습니다. 누가는 그들이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 채 무리 가운데로 예수 앞에 달아내리니”라고 비교적 생생하게 묘사합니다(눅 5:19). 그러나 이것은 마가의 묘사가 지닌 극적인 성격에 미치지 못합니다. 마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의 누운 상을 달아내리니”(막 2:4). 지붕을 뜯어 구멍을 냈다는 마가의 묘사와 기와를 벗겼다는 누가의 표현을 비교해보십시오. 마가는 마치 이 사건이 지금 자기 눈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많은 설교자들이 이 사건에 관해서 설교를 할 때 대체로 마가복음의 본문을 선호합니다. 아마도 그 이유는 위에서 살펴본 대로 마가복음의 기사가 다른 두 복음서의 기사들에 비해서 더 생생하며 더 극적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설교자들이 이 본문에서 강조하는 것은 대체로 세 가지입니다. 첫째, 이 본문에서 사람들이 중풍병자를 불쌍히 여겨서 그를 침상에 메고 예수께 데려왔듯이 우리도 어려운 형편 중에 있거나 아직 주님을 알지 못하여 죄와 영적 사망 상태에 빠져있는 사람들을 주께로 인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데려간 중풍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의원들이 고칠 수 없었던 중풍을 말씀 한 마디로 고치셨습니다. 그 중풍병자는 자신의 가장 큰 문제를 해결 받은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육신의 질병이나 다른 문제들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예수께로 인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여전히 살아계신 예수님은 그들의 문제도 능히 해결하실 수 있으며, 그들의 영혼을 구원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과적으로 이 본문은 성도들에게 전도의 당위성을 강조하는 본문이 되고 맙니다.

        둘째, 이 본문에서 중풍병자를 데리고 온 사람들은 난관을 만났지만 그 난관을 믿음으로 극복했습니다. 그러니 오늘날 우리도 난관에 굴복하지 않는 강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살펴본 대로, 이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끝난 뒤 사람들이 흩어질 때까지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지붕으로 올라가서 지붕을 뜯고 큰 구멍을 내어 병자를 침상 채로 예수님 앞에 달아 내렸습니다. 그들에게 믿음이 없었다면 이렇게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능히 중풍을 치유하실 수 있다는 분명한 믿음을 가졌기에 그들은 남의 집 지붕에 올라가서 지붕을 뜯어 커다란 구멍을 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은 용기를 갖게 하며 난관을 극복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설교자들은 그 어느 때보다 어려움이 많은 오늘날 바로 이런 믿음이 성도들에게 필요하다고 역설합니다. 성도들도 이 본문을 읽으면서 자신의 연약한 믿음을 안타까워하며 난관을 극복하는 강한 믿음을 갈망합니다.

        마지막으로 설교자들이 이 본문에서 강조하는 요소는 협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가가 분명히 밝힌 대로, “네” 사람이 중풍병자를 예수께 데려 왔습니다. 그들이 협력하지 않았다면 침상에 누운 그 병자를 지붕으로 데리고 올라갈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이 하나가 되지 않았다면 남의 집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낼 수 없었을 것이고, 병자를 침상 채 예수님 앞으로 달아 내릴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한 마음을 가지고 협력했기 때문에 중풍병자가 고침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런 사실에 근거해서 설교자들은 성도들이 한 마음이 되어 협력해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성도들이 한 마음이 되어 협력할 때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꿀 수 있고 기적을 이룰 수 있다고 외칩니다. 작은 교회라도 큰일을 할 수 있다고 외치는 것입니다.    

        이상의 세 가지 요소는 모두 마가복음의 본문 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네 사람은 중풍병자를 예수께 데려왔고, 남의 집 지붕에 올라가서 지붕을 뜯어내는 놀라운 믿음을 보여주었으며, 한 마음이 되어 이 모든 일을 했습니다. 따라서 이 세 가지 요소를 강조하면 본문에 충실한 해석이자 설교라는 인상을 줍니다. 실제로 많은 설교자들은 본문 안에 있는 요소들을 말하고 전하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일반 성도들도 본문 안에 있는 요소들을 끌어내어 도전을 받고 적용하는 것에 그칩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야 합니다. 본문 전체에서 저자가 전달하거나 가르치려고 의도한 것이 무엇인지, 본문 전체의 요점이 무엇인지 살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본문에서 마가가 전달하려고 의도한, 가장 중요한 교훈은 무엇일까요?  

        저자의 의도를 파악하려면 우선 본문에 기록된 사건이 어떻게 전개되는지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처음 두 절에서 마가는 사건의 배경을 설명합니다.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자 많은 사람들이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찾아왔고 예수님은 그들에게 도를 말씀하십니다(1-2절). 이런 상황에서 네 사람이 중풍병자를 예수께 데려옵니다. 그들은 집 앞에 모인 많은 무리 때문에 지붕에 올라가서 지붕을 뜯고 병자를 예수님 앞에 달아 내립니다(3-4절). 이 사건의 전환점 역할을 하는 것은 5절인데, 이 절을 축으로 해서 사건의 초점이 네 사람의 행동과 믿음에서 예수께로 옮겨갑니다. 이 본문에서 예수님은 중풍병자에게 죄 사함을 선언하십니다. 그러자 서기관들이 예수님의 행동을 참람하게 여깁니다. 그들이 보기에 하나님 한 분만 죄를 사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6-7절). 예수님은 그들에게 어떤 반응을 보이십니까? 자신이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음을 알게 하려고 중풍병자에게 죄 사함을 선언한 것이라고 담대하게 말씀하십니다(8-10절 상반절). 이어서 예수님은 중풍병자의 병을 치유하는 선언을 하십니다(10절 하반절-11절). 그러자 중풍병자는 즉시 일어나 자기가 누웠던 침상을 들고 나갑니다(12절 상반절)! 이 기사의 대미는 중풍병자가 고침을 받은 것을 목격한 사람들의 반응으로 장식됩니다(12절 하반절).

        사건의 진행을 살펴보면 예수님 및 죄를 사하는 그분의 권세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본문에서 무리와 서기관들은 물론 중풍병자와 그를 데려온 네 사람 모두 예수님과 그가 가지신 죄 사함의 권세를 드러내는 조연 역할을 합니다. 이 사건에서 특이한 점은 네 사람이 지붕을 뜯고 중풍병자를 달아 내렸을 때 예수께서 그 병자에게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5절). 이 경우를 제외하면 마가복음뿐 아니라 다른 복음서에서도 병자를 고쳐주시기 전에 죄 사함을 선언하신 예가 없습니다. 물론 그 사람은 죄 때문에 병에 걸렸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의 병을 고치기 전에 병의 원인인 죄를 사하는 것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 이 병자의 치유를 자신이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음을 알리는 계기로 삼으셨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서기관들과의 논쟁을 통해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죄 사함을 선언하신 예수님의 행동을 문제 삼는 서기관들에게 예수님은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라고 질문하십니다(9절). 서기관들은 죄를 사한다는 말이 참람한 것, 즉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람은 감히 그런 선언을 해서는 안 됩니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죄를 사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느닷없이 서기관들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다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는 말을 비교하게 만드십니다. 예상 밖의 질문에 서기관들은 몹시 당황했을 것입니다. 사람이 네 죄 사함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은 참람한 일임에 분명합니다. 제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런 말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고 말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아마도 이 중풍병자는 용하다는 많은 의원들을 찾아다닌 것은 물론, 자기 집으로 청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도 그를 고치지 못했습니다. 말하자면, 그의 병은 불치병과 다름없었습니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 병자에게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고 말하는 것은 극히 무모하며 위험하기까지 한 일입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입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은 겉으로 드러난 증거를 필요로 하지 않지만, 일어나 상을 들고 걸어가라는 것은 즉각 그 말의 효력이 나타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렇게 말한 사람은 미친 사람이나 사기꾼 취급을 받게 될 것입니다. 눈에 나타나는 증거가 있어야 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고 말하는 것이 더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쉬운 편을 택하여 말씀하신 것이 됩니다.

        그렇게 하신 목적이 무엇일까요? 먼저 중풍 병자에게 죄 사함을 받았다고 선언하시고 이어서 그를 고쳐 주심으로써 자신에게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음을 분명히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그 중풍병자의 병은 죄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병을 고치는 것은 그의 죄 문제를 처리하는 것을 전제하거나 수반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그 중풍병자가 죄 사함을 받은 증거는 그가 고침을 받아 누운 자리에서 일어나 침상을 들고 걸어가는 데서 극명하게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를 가지신 “인자”입니다! 예수님 자신은 이 사건을 통해서 이 점을 서기관들과 무리에게 분명히 알려주고자 하셨습니다. 그래서 친히 자신의 입으로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하노라”라고 분명히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사죄의 선언과 병자의 치유를 통해서 입증되었습니다. 이 사건을 기록한 마가도 자신의 독자들이 이 본문을 읽으면서 예수께서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를 가진 분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깨닫길 원했습니다.  

        물론 이 본문에서 중풍병자를 예수께 데려온 네 사람의 믿음이 극적으로 묘사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예수님도 “저희의 믿음”을 인정하셨습니다(5절, 마 9:2; 눅 5:20). 실제로 그들의 믿음과 병자를 생각하는 마음은 매우 깊고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들은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을 보고 발길을 돌렸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중풍병자를 지붕으로 데리고 올라가서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그를 예수께로 달아내려 고침을 받게 만들었습니다. 얼마나 깊은 믿음이며 얼마나 아름다운 사랑입니까? 복음서 기자는 그저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라고 간략하게 처리했지만, 실제로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크게 칭찬하셨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도 중풍병자를 예수께 데려온 사람들의 믿음을 기리고 그것을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본문에서 네 사람의 믿음에 초점을 맞추기 전에 마가가 강조하는 대로 죄를 사하시는 예수님의 권세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구약성경에서 죄를 사하시는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사 43:25). 이제 신약시대에 예수님이 땅에서 죄를 사하시는 분으로 등장하십니다. 예수님은 창세 전부터 성부 하나님과 함께 계시던 하나님의 아들이며 성부 하나님과 죄를 사하는 권세를 공유하신 분입니다. 그가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셔서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시는 것입니다.

        다윗은 “허물의 사함을 받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말했습니다(시 32:1; 롬 4:6-8). 그렇습니다. 나면서부터 죄인인 우리 인간에게 죄 사함이야말로 가장 복된 것입니다. 죄 사함을 받은 자가 행복자입니다. 우리가 과연 누구에게 죄 사함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 지금은 하늘에 오르셔서 하늘과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를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사하십니다. 따라서 이 본문을 읽을 때 우리는 (하늘과)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을 주목하고 그를 만나야 합니다. 이 본문에서 사람들의 믿음이나 협력에 주목하는 것이 영적인 유익을 준다면, 예수께서 죄를 사하는 권세를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고 그분에게 죄 사함을 받는 것은 얼마나 더 복된 일이겠습니까? (다음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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